어렸을 때,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제게 있어서 엄마의 존재는 내가 특별히 더 잘 해 들여야 할 하나밖에 없는 부모님이라는 생각에 저의 아킬레스 건이 되었습니다. 중요한 일을 하는 중이라던가 저녁 늦게 걸려오는 전화는 (물론 특별한 경우는 제외하고) 받지 않는다는 저만의 규칙 가운데에서도 엄마의 전화는 그것이 시덥지 않은 이유라고 할 지언정 반드시 받는 최우선순위를 가지고 있어요.
이제까지 살면서 엄마와의 갈등이 어떤 것이 있었던가, 생각해보면 숫자적으로 보면 열 손가락에 꼽을 만큼 많지는 않습니다.
특이한 점은 이중의 80%가 제가 성인이 된 이후에 일어났다는 사실.
불과 몇년 전, 같은 지붕아래 사는 엄마와의 숨막히는 갈등 속에 밤늦게 혹은 새벽에 무작정 나가서 동네길을 빙빙 돌며 울었던 경험이 있어요. 서서히 목을 조여오는 것 같았던 그 감정으로부터 일시적일지라 할 지라도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은 엄마와 같이 살던 집을 떠나 제 스스로의 보금자리로 옮겨 물리적인 거리를 둔 것이 90% 이상 차지한다고 믿습니다. 지금도 틈틈히 자주 만나고 며칠에 한번씩은 꼭 안부전화를 하지만 서로간의 거리는 절벽을 향해 내달리는 것만 같았던 저와 엄마의 관계 속에 큰 반환점이 되었어요.
당시에 너무 힘들어서 한국에 사는 오랜 친구에게 마음을 털어놓았더니 이런 책이 있다며 읽어보라면서 이런 저런 간식거리들과 함께 커다란 소포를 태평양을 건너 쏴주었더랍니다. 2백페이지가 조금 넘는 양의 책이지만 페이지 안의 마진이 굉장히 널럴하고 폰트도 커서 제가 주로 읽는 영어 서적처럼 편집했다면 40페이지 이내로 충분히 축약될 수 있을 것 같은 많지 않은 양입니다. 그렇기에 한 시간도 안되는 짧은 시간안에 다 읽을 수 있었습니다.
딸은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다
가야마 리카 지음
2014년 일본에서 발행 한국 번역본은 2018년 발행
가야마 리카는 정신과 의사입니다. 도쿄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30여년간 가족심리 전문의로써 활동하고 있습니다. 릿쿄 대학에서 현대 심리학부 교수로도 학생들을 가르치고도 있습니다.
딸이 외출할 때면 "너는 옷이 그게 뭐니?", 혹은 "너는 그런 옷은 안 어울려!"라면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엄마.
자신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엄마는 이제 몰라"라며 무심한 듯 위협적인 말을 던지는 엄마.
"너한테 기대했는데..."라고 사소한 실수에도 크게 실망하며 한숨을 쉬고, "이런 것도 못하니?"라고 나무라는 엄마.
딸의 성공에 "그건 엄마도 할 수 있어"라며 그 가치를 깎아내리거나 시샘하는 엄마.
딸의 실패에 "너가 더 노력을 했어야지. 남들 보기에 창피해서 어떻게 하니?"라고 나무라는 엄마.
엄마의 조언이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전부 너 잘되라고 그런거야"라며 나 때문에 엄마의 인생이 엉망진창이 된 것처럼 눈물을 글썽이던 엄마.
오빠나 남동생 이야기를 꺼내면 "걔는 남자잖아"라며 나와는 다르다는 듯이 다그치던 엄마
솔직히 말하자면 엄마와의 갈등으로 인해 많이 힘들었을 때에도 이 책을 친구가 한국에서부터 보내줬을 때 '우리엄마가 그정도로 심각한 케이스는 아니잖아?'라면서 이런 책 자체를 본다는 것 자체에서 많은 죄책감을 느꼈었습니다. 내가 좀 더 똑똑하고 상냥하고 현명하고 잘났더라면 엄마가 애초에 나한테 화내거나 실망하는 일이 없었을테니, 궁극적으로는 내가 잘못한 것이라는 생각도 마음속에 많이 있었구요. 엄마가 쏟아내는 언행에 마음이 아파 엉엉 울면서도 엄마한테 이런 책을 읽는다는 것을 들키기 싫어 밤늦게 몰래 이불을 뒤집어쓰고 읽었던 기억이 있네요.
내용이 깊지는 않지만 술술 잘 넘어가기에 어젯밤처럼 엄마가 제게 감정의 쓰레기를 던져놓으시는 날이면 책장에서 꺼내어 다시 읽어보곤 합니다. 오늘 아침 처럼요.
평상시에는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는 '평범한 엄마와 딸'의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지극한 평범한 엄마와 딸 사이의 갈등을 저자의 수년간의 임상 상담 경험에 비추어 설명합니다. 이 책에 나오는 여러가지 많은 엄마들의 잘못된 모습들 안에서 반 이상은 나의 엄마에게도 해당되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평범함'이라는 세 글자 속에 알게 모르게 묵살당하는 소리없는 상처와 비명을 그제서야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여전히 제 안에 완전히 다 풀리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문제가 내가 더 잘나지 못해서 그래'라는 자기비하적인 메시지는 절대 답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으니 좀 더 성숙한 시선에서 딸의 모습인 저를 바라볼 수 있는데 반드시 필요한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딛은 것 같습니다.
엄마-딸의 기울어진 저울. 엄마는 영원한 승자.
일본의 철학연구가이자 윤리학자인 우치다 타츠루는 '딸과 엄마간의 주도권 투쟁'에서 엄마가 전적으로 압승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엄마라는 사람은 자식의 꿈을 태연히 짓밟고 눈물을 글썽이며 '이게 다 널 위해서야'라고 고개를 숙이다가도, 눈물을 훔치면서 '어제 먹다 남은 돈가스가 있는데, 데워서 먹을래?'라고 순식간에 화제를 옮길 수 있는, 매우 억세고 거침없는 존재다. (p.61)
엄마와 딸의 갈등안에서 이로 보나 저로 보나 딸이 우세한 경우에도 엄마는 "너는 내 배 속에서 나왔어"라는 마지막 비장의 카드로 승리를 거둡니다. '원래', '어차피'라는 부사가 자주 붙습니다.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정신과 의사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상담해 온 전문 상담가가 쓴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한 책에서 너무 딸의 편에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우려의 답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엄마와 딸 사이의 갈등에서 엄마는 처음부터 딸을 자신의 경쟁 상대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운명적으로 딸을 감정적으로 몰아가는데 유리한 고지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 모녀와의 상담사례에서도 이러한 기울어진 저울은 쉽게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저자가 참석한 상태로 엄마에게 딸은 그동안 엄마가 자신에게 퍼부어온 가시 돋힌 말들을 이야기하고 그것이 아팠다고 하소연했습니다. 딸의 말을 들은 엄마의 반응은 딸은 물론 상담을 맡은 의사도 당황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난 기억이 안나. 생각이 안 나는 걸 어쩌라고? 너와 네 동생을 키우느라 내가 얼마나 바빴는데! 너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떻게 일일히 기억하니?"
30여년동안 상담 경험을 한 저자는 그래서 이와 같이 말합니다:
"딸의 고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해주는 부모는 사실 드물다."
왜 엄마는 딸인 나한테만 그래?
저도 위와 같은 사례의 피해자입니다. 엄마가 제게 우다다, 말을 쏟아놓을 때면 가만히 듣고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 엄마에게 다가가 이런 말이 아팠노라고 털어놓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바랬던 것은 엄마의 공감과 사과였으나 십중팔구 제게 돌아온 것은 저 상담사례와 마찬가지로 "난 기억이 안난다", 혹은 "너는 그런걸 왜 마음에 담니? 마음이 참 소심하구나!"라는 책망이었거든요.
엄마들은 왜 딸에게 이렇게 가혹한지에 대해 저자는 같은 성(sex, 性)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유추합니다. 같은 배 속에 머물렀다 하더라도 남성인 아들은 엄마에게 신기한 존재이며,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대상이기에 조심스럽게 대하지만 같은 성을 가진 딸에게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는 설명입니다. 자신의 분신으로 보기 때문에 딸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가정하기에 딸과 아들에 대한 차별을 알면서도 이를 줄이거나 억제하기보다는 얼버무리는 모습이 강합니다. 자신이 딸보다 한 수 위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잘 자라준 딸의 약점이나 결점을 아무렇지 않게나 지적하곤 합니다.
엄마로 인해 우울증이 생긴 아들의 케이스보다 딸의 케이스가 월등히 많다는 통계수치도 결국 이러한 것을 반영한 것일까요?
엄마에게 딸은 아들처럼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복제 같은 존재다. 엄마는 아들에게서 '나와 다르다'는 설렘과 전율을 느끼지만, 딸에게는 '나와 같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딸을 낳으면 처음에는 경험해 본 적 없는 육아에 대한 불안감이 크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그래, 어릴 때 나도 이랬지', '내가 이랬을 때 엄마는 이렇게 해줬어'라고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그러다 결국에는 딸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하게 된다. (p.110)
엄마를 사랑하지만 아프고 싶지 않은 딸들을 위한 현실적인 조언
이 책에서 저자는 일본의 유명 가족 심리상담사 노부타 사요코의 저서 '엄마가 부담스러워 견딜 수 없다'라는 책의 내용을 빌려 고통을 받고 있는 딸 들에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많은 딸들은 엄마와의 갈등에 지쳐 거리를 두는 것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결정을 내린 후에도 쓸쓸해보이는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며 죄책감이 생겨 괴로워하는 이들이 대다수입니다.
저자는 노부타 사요코의 말을 빌려 이러한 죄책감은 딸이라면 필연적으로 느낄 수 밖에 없는 감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엄마를 버리거나 배신했다는 느낌에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딸들에게 그 죄책감을 없애는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닌, 그 죄책감은 앞으로의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필요경비라고 생각하라고요.
엄마가 지나친 요구를 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간섭을 할 경우 관계의 경계선을 확실하게 그으라고 조언합니다. 관계의 경계선이란 상대가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말을 불평 없이 들어주던 딸이 갑자기 선을 그으면, 당황한 엄마는 딸의 죄책감을 자극해 어떻게든 그 경계를 무너뜨리려 할 겁니다.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에 "이번 한 번만이야"라는 식으로 타협점을 제시하려 하면, 엄마의 요구와 간섭을 막을 수 없습니다.
어른으로서 꼭 지키고 싶은 영역에 관해서는 명확하고 단호하게 의사를 전달하세요.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말고 반복해서 말하다보면 온전히 내 힘으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나만의 영역이 생길 거에요. (p.157)
잘 모르는 내용이기에 말하기 조심스럽지만...예전에 어디에선가 읽은 진화인류학에 관련한 작은 글에서 여자가 다른 여자를 시기하고 경계하는 건 과거 원시시대에서부터 비롯된 행동습관이며 일종의 본능아닌 본능이라고 이야기했던 기억이 나요. '여적여'라는 단어는 극단적으로 치우쳐져 있는 경향이 강하기에 이를 듣는 것도, 사용하는 것도 굉장히 꺼리는데요, 이 책에서 이야기한, '나와 동일한 성이기에, 그리고 내 배에서 나온 나를 닮은 존재이기에 엄마는 딸에게 함부로 하기도 한다'라는 설명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심리에서 기인한 것이기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좋은 educated opinion/guess/hypothesis라고 조심스레 생각합니다.
관계, 심리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현상도 과학적으로 모두 설명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은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하나의 공식으로 정의하고 설명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 한 게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짧은 에세이집이기에 모녀관계 심리학을 깊이 파고드는 내용은 얻지 못합니다. 이 책이 다루지 못한/않은 다양한 여러 케이스도 당연히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무리 가까운 가족 사이일 지언정, 개개인의 uniqueness와 dignity를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건강한 바운더리(boundaries)인 듯 합니다.
이러한 주제로 더 알고 싶으신 분을 위해서는 Boundaries를 자신있게 추천합니다.
작년에 읽었는데 너무 좋아서 가까운 책장에 놔두고 종종 부분 부분 다시 읽어보기도 하는 책입니다. 감히 a life-changer였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 블로그를 열기 전에 읽었던 책이라 아직 여기에 리뷰는 없습니다만, 처음부터 끝까지 빡세게 재독 후 리뷰도 올려보도록 할게요 :)
(덧붙이는 글: 2021년 8월)
브런치에 글을 연재하게 되면서 이 책에 대한 좀 더 자세한 글과 나누고 싶은 제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아래를 클릭하시면 자세한 글을 보실 수 있어요.
https://brunch.co.kr/@anthseid/2
2021.05.02 - 엄마와 딸, 모녀 관계로 힘들어하는 당신을 위하여. 모녀관계 심리학 도서 추천 (영어책+한국어책)
2021.01.20 - [영어원서리뷰] When to Walk Away (1/2): 나를 위한 올바른 마음 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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