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상상해서 그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 포스트아포칼립틱(post-apocalyptic)' 문학작품은 문명과 사회, 시스템이라는 것에 가려져 평소에는 보기 어려운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것들까지 가감없이 살펴볼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집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주제를 가진 작품들은 옛날부터 꾸준히 쓰여졌으며 독자층들도 단단한 편인 것 같습니다.
많은 아포칼립스 소설들 중에서 '더 로드' 이 소설이 가진 특유의 스탠스는 작가가 이야기를 서술함에 있어 철저하게 지킨 '한정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세계를 뒤흔든 대재앙이 무엇이었으며 언제 어떻게 어디에서 일어났는지 작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 재앙이 일어난 후, 우연하게 생존한 한 남성과 그의 어린 아들에게 모든 초점을 맞춥니다.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기법에 비교해서 설명해보자면 처음부터 끝까지 카메라가 오롯히 이 두사람만을 따라가는 것과 같은 진행방식입니다. 어린 아들을 지켜내야만 하는 아버지의 속마음은 중간중간 드러나기는 합니다만 여기에서조차 작가는 철두철미하게 선을 긋습니다. 결코 장황한 일이 없습니다.
넓은 화각의 렌즈로 사건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기에 독자들의 취향에 따라 '스토리라인 진행방식이 단순하다', 혹은 '지루하다'고 까지의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무척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제 주변에서 총탄과 폭탄이 펑펑 날아다니는 것과 같아 피부의 털이 쫄깃하게 서는 것 같은 화려한 전율을 주지는 않지만, 이 두 주인공들의 거칠고 고된 숨소리만이 제 귓가를 울리는 듯한 불안하고 생경한 날 선 고요함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회색도시를 걷는 발자국 발자국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과 같이 독자의 감각을 세차게 뒤흔드는 것이 아닌, 깜깜한 터널속을 조각배 하나에 의지해 떠다니는 것 처럼 모든 감각을 암흑에 집중하게끔 합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주인공들을 아래로 내려보는 듯한 한단계 높은 위치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어린 아들을 이끌어가는 고되고 지친 아버지의 시선과 같은 고도에서 철저하게 머무를 뿐입니다.
소설 '더 로드'는 지난 2007년, 퓰리처상 소설부문을 수상했습니다. 같은 해 '오프라 북클럽'의 도서로도 선정되어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The Road
더 로드
Originally published: September 26, 2006
Author: Cormac McCarthy
Original language: English
길 위에 선 아빠와 아들. 아들은 아빠의 깃발.
전세계가 뒤집히는 큰 재앙이 일어난 후, 아들은 태어납니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모든 관심과 목적, 목표는 이 아들에게 오롯히 집중됩니다.
오늘의 날짜가 무엇인지, 내가 가는 방향이 맞기는 한 것인지,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이라는 게 있기는 한 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것들이 암흑속에 묻히고 죽음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마주하는 보통의 일이 되어버린 아버지에게 아들의 생존은 그가 주저앉지 않고 끊임없이 달려나가야 할 푯대이자 깃발이 됩니다. 남자의 품에 쏙 들어오는 작고 깡마른 이 아들이 신이 죽음과 자신의 사이에 심어놓은 보호막이자 희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They squatted in the road and ate cold rice and cold beans that they'd cooked days ago. Already beginning to ferment. No place to make a fire that would not be seen. They slept huddled together in the rank quilts in the dark and the cold. He held the boy close to him. So thin. My heart, he said. My heart. But he knew that if he were a good father still it might well be as she had said. That the boy was all that stood between him and death.
이 책을 처음 집었을 땐 깜깜한 색깔의 단순한 책의 표지, 그리고 너무 일상적인 단어로 만들어진 책의 제목에 의아했었습니다. 퓰리처 상을 받을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라면 사람들의 눈에 좀 더 튀게 책의 표지를 만들 수는 없었나, 좀 덜 일상적인 단어로 조합된 제목을 지을 수 없었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책의 마지막장을 덮은 후 다시 이 책의 표지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이만큼 적절한 제목과 책의 커버는 없었겠구나 싶었어요. 모든 것을 다 덮는 '검정색', 그리고 많은 것들이 지나가지만 결국엔 가야할 목표만 남는 '길'이라는 의미의 The Road. 함부로 일러스트를 더하고 다른 단어들을 더하기에는 상당히 절제된 이 책의 무게감이 굉장하다고 느껴집니다. 구글링을 찾아보니 이 책이 유명해진 뒤 약간은 다른 버전(그러나 여전히 심플하기는 합니다만)의 책 커버들도 몇 개 나온 것 같은데, 저는 윗 사진처럼 검은색으로 덮여진 단순한 책커버가 가장 좋아요.
아이야 너는 꼭 살아야 만 해
스토리의 진행과정에서 큰 감정의 동요없이 간단하게 이루어지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는 귀를 기울이고 잘 들여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 종말 사건 후 태어난 아들이기에 그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유일한 가족이자 친구, 대화상대입니다. 어린 아들의 눈에 맞춰 아버지는 간략하면서도 확실한 언어로 그와 커뮤니케이션을 합니다. 둘 사이에 '수다'라고 할 수 있는 이렇다 할 별다른 대화는 없지만서도 아들이 조용히 있으면 계속해서 말을 거는 것은 늘 아버지쪽입니다.
당장 앞의 일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이 상황속에서 자신의 뒤만 졸졸 쫓아오는 이 작은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어떤 말을 해 주어야만 하는 걸까요. 어떤 말을 해 줄 수 있는 걸까요. 생명력을 찾아보기 힘든 길 위에서 어린 아들에게 죽음의 존재는 공기처럼 너무 가까운 것입니다. 큰 감정의 동요없이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시체들을 보며 아들은 원치 않더라도 자신의 모습에 죽음을 얹어 상상해봅니다. 아버지를 따라 살기 위한 걸음을, 길 위에서 계속 하고 있지만 '어린 아이'이기에 그의 시선은 아버지와 다른 것들에 머무르기도 하고요. 좀 더 순수하며 순진하고 약간은 즉흥적이고 본능적이기도 합니다.
작가는 특유의 간결하고 정제된 문체를 통해 독자들이 작고 볼품없이 마른 이 작은 아이가 내쉬는 숨소리에 집중하게 합니다. 너무나도 거칠고 예측 불가능한 험한 세상을 걸어가고 있는 이 작은 아이의 모습이 드라마틱한 대조를 이루면서 그가 품고 있는 생명력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게 만들어요.
이 책이 발간된 후 많은 매체들은 이 책에 대한 기사를 내며 앞다투어 경탄을 보냈습니다. 그 중 보스턴 글로브(The Boston Globe)가 쓴 표현이 제가 이 소설을 읽고 난 뒤의 마음과 가장 비슷한 것 같아 적어보겠습니다:
"No American writer since Faulkner has wandered so willingly into the swamp waters of deviltry and redemption...[McCarthy] has written this last waltz with enough elegant reserve to capture what matters most."
굉장히 불안하게 만들면서도 우아하고 아리송한 듯 하면서도 선명합니다. 감히 20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들 중 한 명인 윌리엄 포크너와 비견될 수 있다는 리뷰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작가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의 매력과 힘, 진가가 여지없이 드러난 작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또다른 저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책 쇼핑 리스트에 넣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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