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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책 서재: Fiction

[영어원서리뷰] 노벨상 수상자 토니 모리슨의 처녀작, The Bluest Eye

by Abigail 2021. 8. 29.

2016년에 디즈니가 선보인 애니메이션 주토피아(Zootopia)는 제게 있어선 쌍따봉을 자신있게 치켜올리는 명작입니다. 주인공인 주디와 닉을 포함한 영화에 나오는 모든 캐릭터들이 하나 하나 참 사랑스럽게 그려졌어요. 너무 안전하고 뻔한 주제만을 고집한다는 평판을 적지 않게 들어왔던 디즈니인데 이 영화의 주제 의식은 통쾌합니다. '차별'이라는 예민한 주제를 얘기하면서도 '역차별'이라는 요소도 포함해, 결국 차별의 가해자와 피해자는 정해져있지 않다는 메시지를 명확하게 던졌거든요. 

 

이렇게 재미있고 영리하고 사랑스러운 영화라니! 주토피아

 

 

 

'차별'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많은 경우 우리 머리속에서 떠오르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얼굴들은 이미 정해져있는 것 같은 선입견을 발견하곤 해요. 

백인과 흑인, 남성과 여성, 부자와 빈자.

전자는 차별의 가해자이며 후자는 차별의 피해자입니다. 

이러한 잣대로 우리는 상당히 자주, 세상을 읽고 해석하고 판단하려 들곤 하지요. 

 

차별이 악한 이유는 그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적인 요소로 그 사람의 타고난 가치를 재고 평가하려 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태어나보니 남성 혹은 여성이었고 백인, 황인, 혹은 흑인의 모습을 가졌던 것인데 마치 그것만이 그 사람의 전체적인 가치를 나타내는 양, 판단하고 대하는 것은 비논리적인 것을 넘어 비인간적인 일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차별에 있어서 정해진 가해자와 피해자는 사실상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선입견적으로 피해자라고 여긴 그룹이 가해자에 속하는 그룹을 차별할 수 있고 같은 특징을 가진 사람들 내에서도 차별할 수 있는 거구요. 

 

그렇기때문에 저는 선입견적인 차별 만큼이나 역차별 역시 같은 차별인 만큼 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연유로 책을 읽을 때에도 문학이던 비문학이던 '이 사람은 백인이니 무조건 가해자야', '이 사람은 여성이니 무조건 피해자야'와 같은 1차적 프레임을 강하게 처음부터 만들고 이를 서포트해 줄 요소들만을 선택적으로 골라 넣어 마치 그것이 온 세상의 유일한 진리인듯이 호소하는 종류는 매우 경계하며 피하는 편입니다. 차별을 해결하기 위해 또다른 차별을 선동하고자 한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The Bluest Eye

Toni Morrison

Originally published: 1970

 

 

노벨문학상 수상자 답게 토니 모리슨의 글실력은 가히 'good'을 훌쩍 뛰어넘어 'great'이라고 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든 의미는 통할지언정 모래알을 억지로 씹어먹는 것과 같은 퍽퍽함에 읽기가 힘든 소설이 있는가 반면, 마치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듯 독자를 압도하는 소설이 있는데, 이 소설은 확실히 후자에 속해요. 

 

소설 중간 중간 화자가 바뀌는 포스트모너니즘 문학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어렵지 않게 새로운 캐릭터에 몰입이 되고 전체적인 스토리가 눈앞에 선명히 보이는 것은 토니 모리슨 작가의 뛰어난 역량 덕분일 것입니다.

 

 


 

 

 

 

 

이 소설의 매력은 독자가 생각하기에 따라 주인공-악당이 분명한 단순한 스토리라인이 되기도, 혹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복합적인 어려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다면성인 것 같습니다.

 

페콜라 브리드러브(Pecola Breedlove)는 파란 눈동자를 가지고 싶어 하는 어린 흑인 소녀입니다.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s)이 효력이 있었던 1940년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이 소설 안에서 흑인과 백인은 피부색에 따른 다른 사회적 대우를 받습니다. 페콜라의 사정은 더욱 딱합니다. 흑인이라는 것 하나로 차별을 받는 것도 서러운데 심각한 가난까지 있습니다. 게다가 집에는 제대로된 부모상을 찾기 어렵습니다. 순진한 작은 소녀에게 잔인한 걸림돌이 참 가득하기도 합니다.

 

이 소녀는 자신이 동경하는 백인들처럼 파란 눈을 가지면 자신이 아름다워 질 것이라고, 그러면 자신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것이고 자신의 인생이 달라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면 자신의 눈이 파란색으로 변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이 순진한 소녀. 참 슬프고 화나고 안타까운 것은 그런 소녀의 이야기를, 마음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의 엄마조차도 그녀를 외면합니다. 목사는 그녀를 이용합니다. 소녀는 끝까지 외롭습니다.

 

시대상이 시대상인만큼, 백인들이 흑인들을 하대하고 무시하고 조롱하는 장면이 이곳 저곳에서 여과없이 불쑥 드러납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 당시에는 일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까요. 그런 껄끄러운 장면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모리슨은 동일한 온도와 속도의 어투를 유지합니다. 분명 억울하고 안타까운 사건은 맞는데 마치 뉴스에서 보도하는 것 처럼 객관적인 묘사로 풀어내는 장면을 보고 참 영리하다고 생각했어요. 감정적인 장면을 감정적으로 풀어내면 손사래치며 도망가거나 시선을 피할 가능성이 높은 독자들을 덤덤함으로 유지하는 영민함이라고 해야 할까요.

 

소설의 후반부, 험악한 일을 겪고 돌아온 페콜라에게 주변 사람들은 숙덕거립니다. 그녀가 얼마나 못생기고 못난 모습인지 숨기지 않고 표현해요. 그러면서 소설이 마무리 되는데요, 이 부분을 보면서 당시 시대상에 만연했던 백인-흑인사이의 차별과 갈등을 넘어 흑인들 안에서도 아니 어쩌면 동질감이라는 이름 아래 더더욱 거침없이 날을 세우는 '차별'이 폭로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시 말해 페콜라가 거무잡잡한 피부색으로 당해야만 했던 인종차별이라는 외부적인 차별에 더해 같은 흑인들 안에서도 가난하다고, 못생겼다고, 집안 사정이 좋지 않다고 천대받고 무시받는 내부적 차별 또한 찬찬히 그려내는 모습을 통해 차별에는 이름표가 없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지요.

 

 


 

 

엘에이에 있는 어느 박물관에는 문 모양의 전시품이 있는데 그 위에는 '아무런 선입견이 없는 사람만이 이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라고 써있다고 해요. 재미있는 사실은 이 문은 처음부터 굳게 잠겨져 절대 열릴 수 없게 만들었다고요.

 

다시 말해 선입견이 없는 사람은 없다고. 우리 모두는 알게 모르게 누군가를 차별하고 있고 또 그러한 차별을 좋던 나쁘던 받고 있다는 것의 그 작품의 메시지이지요.

 

아주 어리다고만 할 수 없는 나이가 되니 때로는 제 안에 저도 몰랐던 더러운 것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와 놀랄 때가 많습니다. 내가 이러한 생각을 했었나, 내가 이러한 틀에 갇혔었나, 라는 언짢은 발견을 할 때마다 속상함과 동시에, '알긴 알았지만 해결할 수는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더 우울해지기도 해요.

 

죽을 때 까지 제 안에 있는 모든 차별적인 요소들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라고 해도 꾸준히 계란을 던져야 하는 이유는 자명한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발목을 잡고 또한 내 발목 역시 잡을 수 밖에 없는 마음속 엉겅퀴를 조금이라도 제거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제 마음을 닦아 비춰보는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토니 모리슨의 글이 참 아름다울 지언정, 스토리가 스토리인지라 이 책은 감정적인 여운이 참 길게 남아요. 감성이 섬세하신 분들에게는 참 힘들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토니 모리슨의 다른 책도 기대가 됩니다. 다만 저도 조금은 쉬고 읽을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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