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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책 서재: Fiction

[영어원서리뷰] 살인자일까 억울한 피해자일까. Alias Grace by Margaret Atwood

by Abigail 2021. 11. 19.

제가 살고 있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북쪽으로 약 30분정도 올라가면 리치몬드힐(Richmond Hill)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캐나다 초창기, 당시 유럽을 휩쓸던 기근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새로운 기회를 찾아 영국 등지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생긴, 역사가 깊은 도시입니다.

 

마가렛 앳우드의 소설 Alias Grace (한국어 번역본: 그레이스)는 바로 이 토론토와 리치몬드힐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미 문학계에서 유명한 캐나다태생 작가 마가렛 앳우드가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쓴 소설 Alias Grace는 2017년 동명의 미니시리즈 드라마로도 만들어졌어요. 넷플릭스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원작 소설과 별도로 6화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길이인데다가 대본도 연기도 탄탄한 작품이라 추천합니다. 작가 마가렛 앳우드도 카메오로 잠깐 나와요. 

 

 


 

Alias Grace

By Margaret Atwood

Originally published: September 1996

 


 

역사소설(Historical Fiction)의 경계가 불분명해 보일 때가 많습니다. 허구로 쓰여지는 이야기라는 정의를 가지고 있는 소설이 이미 일어난 사실의 기록이라는 역사를 만났을 때, 역사적 사실과 허구의 선택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작가의 상상을 더한 사실의 왜곡을 어느정도 선까지 허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작가마다, 문학비평가마다, 학자들마다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역사소설을 무척 좋아하는 저는, 커다란 맥락의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이야기가 진행되는 종류는 선호하는 편이 아닙니다. 가능하면 전해진 그대로의 기록을 보존하되 빈 곳에 살을 붙여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소설들을 좋아해요. 후자의 경우 정해진 틀을 유지하면서 작가의 상상력을 펴야 하니 더 전자보다 글을 쓰기가 훨씬 더 까다롭고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을 해봅니다. 

 

이 책,  Alias Grace 는 후자에 속하는 소설입니다. 19세기 중순, 캐나다 토론토를 뜨겁게 달구었던 실제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사건의 중심이 되는 Grace Marks는 과연 살인을 저지른 진범인지, 아니면 불운하고 힘없는 피해자였는지에 대해 조사를 시작하면서 스토리가 진행됩니다.

 


 

그레이스, 정말 당신은 그들을 죽였나요?

 

Alias Grace (Drama)

 

 

1843년, 리치몬드힐에서 두명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입주 여종 그레이스 마크의 보스였던 토마스 키니어 (Thomas Kinnear)와 그의 또다른 여종이었던 낸시 몽고메리(Nancy Montgomery)는 각각 총상 그리고 물리적 격파로 인한 심각한 두부손상을 입고 숨을 거둔채 발견됩니다. 이 둘을 죽인 유력한 진범으로는 같은 집에서 살고 있던 그레이스 마크제임스 맥더못(James McDermott)으로 좁혀집니다. 이 둘은 토마스 키니어와 낸시 몽고메리의 소지품을 훔친 채, 밤새 도주, 토론토 항구에서 배를 타고 미국에 건너가 있는 상태였습니다. 결국 이 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잡히게 됩니다. 제임스는 살인죄로 교수형에 처해지지만 그레이스는 종신형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둘의 처벌이 달랐던 이유는 자신은 원하지 않았지만 제임스의 강제적인 협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그의 살인계획에 동참할 수 밖에 없었다는 그레이스의 변호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책에서는 한가지 이유를 더 제안합니다.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되지 않았을 정도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었던 사회의 분위기를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살인을 한다는 것, 그것도 자신의 직장 상사이자 직장 동료를 잔인하게 죽인다는 것은 약하고 여리기만 한 여성은 감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예상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지요. 

 


 

우선 너를 안아주고 싶어

 

Alias Grace (Drama)

 

 

 

이러한 사실에 더해 마가렛 앳우드는 몇몇 중요한 허구의 인물을 소설안에 소개하면서 이 단면적인 사건에 더욱 풍부한 각도와 시각을 제공합니다. 이 미궁의 살인사건에 대해 좀 더 조사하고 그레이스의 심리를 이해하고자 붙여진 (정신과) 의사, 사이먼 조던(Simon Jordan)은 이 책의 진행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인물입니다. 사이먼은 그레이스를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그녀의 인생에 대해 알아갑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올곧이 들어주는 사이먼을 통해 그레이스는 감옥을 나갈 수 있겠다는 희망을 보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지요. 

 

그녀는 아일랜드 출신의 이민자입니다. 기근과 가난으로 부모님을 따라 아일랜드에서 토론토로 이민을 오게 되지만 그녀의 엄마는 토론토로 건너오는 배 안에서 병으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망나니였습니다. 술에 빠져 자식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지요. 형제들중 가장 맏이였던 그레이스는 결국 나이를 속이면서까지 인근 부자집의 하녀로 들어가 일하게 됩니다. 

 

의지할 사람 없는 먼 타향에서 가족들과 떨어져 온갖 시련을 받으면서도 그레이스는 미련할 만큼 묵묵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해야할 일을 완수합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 동료 하녀 메리 휘트니(Mary Whitney)를 만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메리에게 닥친 불행으로 인해 그레이스는 더욱 외롭고 서글픈 삶을 살게 되어요. 

 

작가 마가렛 앳우드의 말처럼 이 책은 역사적 사실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왔다는 점에서, 이 책 곳곳에서 보이는 오늘날의 현실과는 다른 점들에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았습니다. 같은 영국령이긴 하지만 아일랜드 출신이라는 점에서 토론토땅에서 그레이스와 그녀의 가족이 받았던 차별. 당시 캐나다에서는 개신교냐 천주교냐에 따라서 사람들이 받는 차별이 있었다고도요. 

 

아일랜드 개신교 출신, 가난한 가정, 편부모, 사회적으로 권리나 보호가 보장되지 않는 어린 나이의 여자아이였던 그레이스가 건너야 했던 시간들을, 현재 감옥에 갇혀있는 성인 그레이스가 담담히 이야기하는 부분은 참 가슴이 저릿했습니다. 그녀의 말을 끊고 책 안으로 뛰쳐들어가 그녀의 손이라도 꽉 잡아주고 싶을 만큼. 

 

 


 

 

Alias Grace (Drama)

 

 

이 제법 두꺼운 책에서 그레이스를 중심으로 수많은 일이 펼쳐집니다만, 그 모든 일 하나하나가 촘촘하게 개연성이 있어 시간가는 줄 모르고 휘리릭 읽어내려간 책입니다. 도서관에서 빌려봤다가 마가렛 앳우드의 탄탄한 인물 설정, 시같은 문체, 그리고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하고 다면적인 이야기 구성에 반해 결국에는 하드커버로 구입까지 하게 되었어요.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그 일의 질이 하늘과 땅처럼 달라지기도 하듯,

글이 만연한 세대에서 쉽게 스스로 '작가'라고 할 수 있는 시대에, 탁월한 글실력을 가지고 있는 작가를 만나면 가슴이 뛰도록 반갑고 벅찹니다. 글을 멋지고 아름답게 쓰는 실력을 키우는 데 이 책은 여러번 읽으면 도움이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뛰어난 작가의 책을 여러번 읽으면 그 작가의 실력을 어느정도는 흡수하며 따라갈 수 있기에 많은 작가들도 실천하고 있는 방법이라던데, 이 책은 그렇게 하기에 충분히 그럴만한 책입니다. 처음 읽은 마가렛 앳우드의 책인데, 왜 그녀가 이토록 큰 명성을 얻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어요. 

 

여성 인권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쓰는 작가로 알려진 마가렛 앳우드. 

 

저는 이 소설책에서 촉망받는 의사 사이먼을 만들어내고 그를 그레이스의 전담 상담자로 만든 것은 정말 영리한 소설적 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레이스에게 이 살인사건의 키가 주어져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커리어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만큼, 사이먼은 그저 그레이스에게 마이크를 넘기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밖에 없어요. 그레이스가 이 소설책의 메인 화자로 설정된 것은, 아무것도 힘이 없는 그녀에게 굉장한 힘을 부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지금은 감옥에 있는 가난한 여종이지만, 사이먼을 포함한 그녀보다 지위가 높은 다른 여러 사람들이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듦으로써 그녀의 지위를 순식간에 위로 끌어올렸거든요. 정말 영리하지 않습니까.

 

여성 인권에 관하여 때로는 과도하게 기울어져 있다, 혹은 지나치게 편협하다 라는 비난을 받고 있기도 한다는 작가 마가렛 앳우드의 작품이라서 사실 이 책을 펼치는 데 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지만 최소한 이 책은 참 잘 쓰여진 책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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