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순간 부터인가 새로운 책을 읽기 시작할 때면 목차(Contents)를 제일 처음 훑어보게 되고 그 다음으로 서문(Introduction)을 차분히 읽어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눈길이 가는 제목과 북디자인으로 책에 손이 갔다 하더라도 목차와 서문을 읽어보면 이 책이 내가 상상하는 '이 책은 이런 책일꺼야'라는 예상과 어느정도 들어는 맞는지,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지 살펴보고 구별하기에 썩 괜찮은 방법인 것 같아서요.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빌려온 이 책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픽업하자마자 근처 벤치에 앉아 목차를 살펴본 후 후다닥 서문을 읽어봤어요. 저자가 롤링 스톤(Rolling Stone) 잡지사에서 일했을 과거 시절, 잡지사 직원들끼리 모여 만든 밴드에서 무려 리드싱어가 되어달라는 러브콜을 받습니다. 전문 트레이닝을 받은 적이 없기에 어떻게 목을 풀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으며 그렇게 한 적도 없다고 해요. 하루종일 조용히 글만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무리한 발성은 결국엔 저자의 목에 상흔을 남겼고 장시간동안 상한 목소리로 지냈어야 하는 경험을 했다고 해요.
여기까지만 읽으면 유감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어느 직장인 밴드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 책의 저자, John Colapinto는 달랐습니다. 자신의 목소리가 갈라지고 잠기는 경험을 통해 '목소리'라는 매개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파기 시작했어요. 무려 25여페이지에 이르는 bibliography를 자랑하는 이 책의 간략한 탄생스토리입니다.
물결이 일정한 패턴으로 퍼지고 물건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고와 같은 물리적 현상이 과학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하면,
하나의 매개체가 갖는 역사적, 철학적, 사회적, 인지적, 관계적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호기심은 John Colapinto와 같은 저널리스트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일테지요. 똘끼같아 보이는 집요함이 보여 서문을 읽으면서 키득키득 웃음이 나더라구요.
This is the Voice
한국어 번역본 없음
사회심리학, 언어학, 역사, 인문학
Amazon.com 별점 (포스트 작성일 기준): 리뷰수 62개, 별점 4.4/5
Goodreads 별점(포스트 작성일 기준): 리뷰수: 117개 별점 4.21/5
*아마존과 굿리즈, 두 사이트에서 리뷰수가 매우 낮은 것은 이 책이 신간이라서 그렇습니다.
올 해 1월 26일 세상에 나온, 아직 따끈따끈한 책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 책은 mesmerizing한 책입니다.
이 책에 거론되는 인물들도 다양합니다. Cicero, Darwin, B.F. Skinner, Noam Chomsky, Steven Pinker, Hitler, Barack Obama, Marilyn Monroe, Winston Churchill... '목소리'라는 커다란 주제 안에서 저자가 다루는 주제가 실로 다양해서, 마치 언어학, 역사학, 철학, 물리학, 의학, 아동학, 문학 등등의 교수님들이 한 데 모여 하나의 커다란 프레젠테이션을 해 주신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태어날 때 부터 가지고 있고 매일 매일 접하는 여러가지 다양한 '목소리'들 뒤에 숨어있는 다각적, 다면적 스토리가 각각 굉장히 매력적이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어렵고 깊은 내용들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어요.
아무래도 이 책은, 구입하여 밑줄 쳐가면서 다시 읽으려구요! 👍
남성의 목소리 vs. 여성의 목소리
성 호르몬의 영향으로 인해 일반적으로 여성은 남성에 비해 높은 톤의 목소리를 냅니다. 이러한 음성의 높낮이는 우리가 태어난 신체에 따라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지요. 이러한 신체적인 남성과 여성의 목소리 톤의 차이는, 자연스레 높은 톤의 목소리를 '여성스럽다', 낮은 톤의 목소리를 '남성스럽다'고 묘사하는 표현을 만들어냈습니다.
높은 여성의 목소리와 낮은 남성의 목소리, 이 둘 사이에서 오는 차이는 단순히 물리적 현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심리적, 인지적 인식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학자들은 알아냈습니다.
세계2차대전, 전쟁에 참여한 여러 나라들의 여성들의 목소리를 분석해보았습니다. 사회와 가정을 지키던 많은 신체건강한 남성들이 전장에 나갔기 때문에 남성의 자리였던 사회내 공석들이 자연스레 여성들에 의해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주부였던 여성들이 여러 리더십의 자리를 맡게 되었는데 신기하게 여성의 목소리가 낮아지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권력과 힘이 필요한 사회적 자리에서 자신의 역량을 십분 활용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높은 목소리 톤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인지했던 것의 결과였던 것이지요.
Theranos 스캔들의 주인공 Elizabeth Holmes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미디어와의 인터뷰때마다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럽고 목소리를 낮추어 남자와같은 목소리를 냈던 그녀였어요. 남성들이 가득한 실리콘 밸리에서 여성성을 숨기기위한 것이라고 추측했었는데, 이를 넘어 비정상적으로 자신의 힘과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계산적인 행동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목소리 톤에 따라 달라지는 연애, 결혼 가능성?
여기, 남성의 목소리에 대한 재미있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호랑이, 개, 늑대와 같은 동물들은 자기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거나 공격할 때 낮은 목소리로 그르렁대는(growl) 공통점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남성들의 목소리에도 이러한 양상이 있다고 해요. 남성들끼리 서로 힘겨루기를 할 때 상대보다 나의 목소리를 낮게 깔아줌으로써 상대방에게 투시하는 나의 힘이 내가 가진 실제 힘보다 크게 느껴지도록 위협하는 심리라고 이 책은 설명합니다.
그런데 남성들의 낮은 목소리는 결혼에 있어서는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한다고 해요. 낮은 목소리를 가진 남성의 경우 연애할 때에는 인기를 얻을 수 있지만 결혼 상대를 찾는 여성들에게는 '공격적이다', '지배하려 한다', '공감력과 이해력이 떨어진다', '차갑다'와 같은 이미지를 심어주어 비교적 낮지 않은 목소리를 가진 남성에 비해 저평가를 받는다고요.
배우 이선균씨처럼 굵은 목소리를 가지신 분들은 잘생긴 얼굴처럼 여성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을 타고난 lucky한 케이스라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연구 결과는 의외에요. 저는 목소리 낮은 분들이 참 매력적인데 말이지요... 그런 남자와 연애를 하다가도 결혼을 하려고 하면 저도 마음이 바뀌려나요? 🤔
영어 악센트로 달라지는 당신의 지위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의 1912년 연극 '피그말리온 (Pygmalion)'은 어느 한 가난한 시골출신 소녀가 말하는 법을 고쳐 런던 상류계층으로 입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렇듯 이 연극에서 시사하는 '말하는 톤'의 영향력과 중요성, 다시 말해 우리가 흔히 '악센트(accents)'라고 표현하는 것들의 힘은 허구속의 이야기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듯 합니다.
영어의 본고장인 영국에서는 미국보다 역사가 긴 만큼, 굉장히 다양한 악센트가 존재합니다. 우리가 흔히 영국의 표준 발음이라고 생각하는 영국 발음은 명문 학교(prep schools such as Eton and Harrow and universities such as Oxford and Cambridge)내에서 철저히 가르쳐졌다고 해요. 그렇기에 그런 특정 발음 체계를 가진 이들은 자연스레 '상류층'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는데요, 이것이 시간이 지나 국제적으로도 그러한 특정 발음체계를 가진 사람들은 '도도한 신사'라는 인상을 주게 된 것이지요.
미국은 북부와 남부의 차이가 두드러집니다. 영국처럼 심하진 않을지언정 각자의 독특한 발음체계를 가지고 있지요. 북부의 영어를 쓰는 사람은 '똑똑하다', '도시적이다', '이기적이다', '차갑다'라는 인상을, 남부의 영어를 쓰는 사람은 '목가적이다', '다혈질이다', '무식하다' 라는 인상을 가집니다.
지역 말고도 출생 ethnicity에 따라 악센트가 정해지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미국에 사는 흑인들입니다. 흑인들의 영어 악센트는 재미있게도 미국의 어느 곳을 가더라도 굉장히 발음체계를 유지한다는 특징들을 가집니다. 이러한 악센트를 지키는 것은 그 그룹의 멤버라는 표시이자 결집력을 더욱 강하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백인-흑인 혼혈 출신인 미국의 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러한 흑인들의 악센트내에 숨어있는 문화적 메시지를 잘 이해하며 이용했습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동부의 억양이 강한 영어를 사용했지만 흑인 시민들과의 만남에서는 흑인 영어의 악센트를 자연스럽게 사용함으로써 그들의 환호와 지지를 영민하게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자택근무가 장기화되면서 화상채팅으로 하는 여러 모임과 회의에 지쳐가고 있는 저에요...😢
스크린을 오랜 시간 보고있자니 눈이 피곤해서, 여가시간에도 유튜브같은 영상매체보다는 팟캐스트와 같은 오디오매체에 자연스럽게 더 마음이 가는 것 같은 요즘입니다.
팟캐스트, 오디오북으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가만히 든게되는 시간이 예전보다 길어지다 보니 '목소리'에 대한 자잘한 질문들이 두둥실 떠오를 때가 있었는데요, 이 책을 통해 저의 가벼운 질문을 넘어 '목소리'라는 커다란 개념을 관통하는 여러 학문적 '기둥들'을 만나본 느낌입니다.
참, 이 책을 쓰신 분의 글솜씨 또한 굉장히 유려합니다. '임마, 이것이 뉴욕타임즈 작가의 짬바다'하는 것 같아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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